책 이야기

<타임 푸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놀자!

수이 Sooi 2019. 9. 7. 15:05

<타임 푸어> 브리짓 슐트 지음, 안진이 옮김

 



     어느 날, 여가의 사회학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께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타임 푸어>라는 책을 가방에 넣으시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감각적인 책 제목의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고, 두 번째로는 그려져 있는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인상적이었다. 둥근 시계를 붙잡고 어린 아이를 업은 채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모습이었다. 이 책에 대해 궁금해져서 며칠 뒤에 여쭈어보려고 했는데, 강의계획서를 보니 북 리뷰 도서 다섯 권 중에서 한 권이 바로 이 책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이 책으로 골랐다. 
     ‘현대인들은 바쁘다’ 우리는 이 말을 무의식중에 정말 많이 말하고, 듣고, 본다. 꼭 이 세상의 불변하는 진리 같은 문장이다. 우리가 바로 그 ‘현대인’이기 때문에 바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심지어 시간이 부족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필자였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느껴도 그 것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촉박함을 나의 능력을 키워서 느슨해지도록 하고 싶었다. 흔히 불리는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 시간의 촉박함을 이겨낸 사람들로 보였다. 
     몇 달 전, 좋아하고 잘 따르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선생님을 만나 뵌 적이 있다. 연희동에 새로 짓고 있는 공사판이던 선생님의 집도 구경하고, 그 곳에서 가까운 선생님과 선생님 부인이 함께 쓰시는 작업실도 구경했다. 두 분은 모두 그림 작가이시다. 후에는 작업실 앞에 있던 샤브샤브 집에서 밥을 함께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지 내가 학교교육에 가진 불만들, 작가로서 어떻게 나아갈 지에 대한 고민들, 이게 맞는지 틀린지 흔들리는 가치관들을 마구마구 쏟아내었다. 선생님의 대답은 내 마음을 언제나와 같이 참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의견에 많이 동의해주셨기 때문이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전에도 말했지만 일단 대학생이 듣는 학점(18학점)은 너무나도 많은 것 같아. 나는 수업을 할 때(선생님은 대학교에서 전공강사로 수업을 몇 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들 좀 놀게 휴강도 몇 번 해주고, 한 번은 같이 계곡도 놀러가고 하는 게 좋은 것 같은데, 항상 넘쳐나는 텍스트랑 과제로 이루어진 수업은 학생들을 너무 지치게 하는 것 같아.” 학생인 나보다도 더욱 느린 삶을 추구하고 계셨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흠, 그건 요즈음 시대에는 지나친 느림 아닌가?’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는 데, 그 선생님이 떠올랐다. 점점 읽어가면서 더욱 나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몰입하였다. 선생님이 주신 편안함 그 이상의 감정을 진심으로 받을 수 있었다. 


     <타임 푸어>의 지은이 브리짓 슐트는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의 기자이다. 그녀가 묘사한 생활을 읽다보면 할리우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혹은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이 한 손에는 스마트폰 한 손은 자동차 핸들을 잡고 한꺼번에 두,세 가지의 일을 정신없이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 것은 희귀한 모습이 아니다. 매일 아침, 학교 가는 길에 버스를 타러 나갈 때면 마음 편히 시간을 즐기고 있어 보이는 사람은 없다. 잠이 부족해 고개를 수없이 끄덕이며 졸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 문제로 전화통화에 한창이다. 교복을 입지 않아도 학생들을 알아 볼 수 있다. 단어 책을 보고 있거나, 흔들리는 버스에서 수학문제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저자는 시간에 쫒기는 삶이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인 것을 파리의 ‘시간활용 학술대회’에서 확신하고 이 현상에 대해 심도 있게 조사하고 연구하게 된다. 
     뇌도 망가뜨리고, 우울증까지 줄 수 있는 시간 스트레스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자는 바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온다고 말한다. 바로 ‘이상적인 노동자’의 개념이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이상적인 노동자란 집안일과 육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직장에 완전히 헌신할 수 있는 인간상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기가 태어나도 출산휴가를 쓰지 않으며 탄력근무제, 시간제 근무, 재택근무와 같은 가족 친화적 정책도 필요 없다. 이상적인 노동자의 자아상은 일에 완전히 밀착되어 있으므로 심지어 본인의 건강이나 가정생활에 지장이 생겨도 끝없이 일만 한다. 자, 이 문단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자. 이 노동자의 자아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살고 싶은가? 자신 있게 이런 삶을 살고 싶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개념이 노동환경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저자는 ‘미국의 노동환경’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서술하고 있다. 필자는 이 문제가 한국에서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저자의 말을 그대로 가져왔다). 아니, 지대한 영향력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용자들이 이상적인 노동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상적인 노동자상은 산업혁명의 초창기에 생겨난 꽤나 오래된 개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 되었고, 그 노동은 공적인 활동이라 불렸다. 하지만 여자들이 하는 노동은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이 받는 것 같이 보수를 정당하게 받지 못했고, 노동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때조차 많았다. 1970년대 초반부터 여자들이 전통적으로 남자들만 활동하던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1985년부터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각종 전문교육을 받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많아졌다. 짧은 시간에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여기까지 좋다. 그러나 문제는 고용주가 바라는 이상적인 노동자의 모습은 놀랍도록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대다수 가정에서 엄마와 아빠가 모두 유급 노동을 하는데도, 남녀가 노동을 분담해서 아빠는 ‘이상적인 노동자’가 되고 엄마는 집에서 ‘이상적인 엄마’노릇을 하는 것이 최고라는 관념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한국의 사정은 미국과 조금 다르겠지만, 더 긍정적이지는 않다. 미국과 다르게 대다수의 양부모가 유급 노동을 하지 않을 경우, 엄마와 아빠 모두 노동자인 가정은 압박이 더욱 강할 것이다. 
     정신적인 압박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임금의 격차도 매우 뚜렷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노동자상을 깨기는 더욱 어렵다. 이 책에 쓰인 예시를 몇 가지 들자면, 아빠들은 일명 ‘아빠 보너스’를 받고 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엄마들의 임금은 낮아진다. 상황이 이러하니, 육아를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신세대 아빠들마저 떡 하니 놓여있는 출산휴가를 쓸 용기가 없다. 요즈음 출산휴가가 존재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지만, 말 그대로 ‘존재’만 할 뿐 자연스럽게 휴가를 쓰는 직장문화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브리짓 슐트는 이토록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변화하려는 긍정적인 변화의 움직임들을 몇 가지 소개해 주고 있다. 자율성과 전문성, 목적의식을 중요시하는 소프트웨어 디자인회사 멘로는 직원이 갑자기 부재해도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유연한 조직문화로 언제나 대체 불가능한 직원이 있기 때문이다. 한 로펌 클리어스파이어의 사무실은 텅 비어 있다. 변호사들이 모두 자신의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로펌에 일을 의뢰했을 때 일반적인 대형 로펌에 맡겼을 때에 비해 결과물의 수준은 비슷했지만, 비용은 4분의 1로 줄었다고 한 CEO는 말했다. 모두 조직문화가 가져온 긍정적인 결과였다. 제도가 아무리 개방적이고 혁신적이어도, 문화가 따라가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환경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여담으로 이 책을 읽는 동안 겪은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을 말하고 싶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이태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에 필자는 버스에서 이 책, <타임 푸어>를 읽고 있었다. 독서를 할 때 마음에 들거나 동감하는 부분에 연필로 줄을 그어가면서 또는 메모를 해 가면서 읽는 습관이 있어 이 날도 언제나와 같이 연필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선을 긋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글씨는 쓰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당연하고도 웃기는 상황에서 또 한 번 깨달았다. 환경 혹은 문화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슐트가 이 책에서 전하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적인 자아상이 있다. ‘좋은 엄마’이다. 이 ‘완벽한 엄마’라는 환상은 이상적인 노동자보다도 해내기 어려워 보인다. 전업 주부라면 전업 주부대로, 일하는 엄마라면 일하는 엄마대로 자신이 좋은 엄마인가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며 괴로워한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자아상은 과잉모성으로 드러나며 죄책감, 두려움, 양가감정에 의해 존재한다. 작가가 소개한 엄마들의 모습들이 이 과잉모성을 잘 드러내준다. 어떤 한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이 컵케이크를 굽고 싶은 건가? 아니면 사람들이 나를 나쁜 엄마라고 생각할까봐 이 일을 하려는 건가?” 자신의 정체성보다 사회가 부추기는 엄마의 정체성이 강하게 반영된 삶을 사는 것이 엄마들을 힘들게 한다. 위에 언급한 대로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이상적인 엄마’에 반기를 들고 도전하는 것은 혼자 하기 쉬운 일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힘을 얻는 엄마들이 있었다. 이 또한 긍정적인 변화의 출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슐트는 ‘놀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통계적으로 항상 세계에서 여유롭고 행복한 나라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덴마크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배운다. 물론 저자도 안다. 덴마크와 미국은 같지 않다. 대륙도 문화도 다르며 보이는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국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방안들은 노력하여 체득하는 것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가며 습관으로 만들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 작년에 휴학을 하고 10개월간 스페인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스페인어를 배우고 돌아왔다. 주변 사람들이 참 많이도 물어보았다. 
     “왜 스페인에 갔어?”
     “왜 스페인어를 배웠어?”
     “너 스페인유학 준비해?”
     내가 간 이유는 뚜렷했다. 정말 스페인에 살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었다. 스페인어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배워본 적도 없었다. 정말 마음 속 깊이 예전부터 꿈꿔온 ‘스페인에서 언어배우며 살기’를 이루고 싶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부모님도 완강히 반대하셨다. 전공과 무관했기에 직업에 관련된 멋진 스펙이 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슐트가 책에서 알려준 바와 같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으며 10개월의 소중한 경험들은 나에게 큰 긍정적인 재산으로 남아있다. 이 경험이 슐트가 말한 ‘놀이’가 아니었을까. 거창하게 해외로 나가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카카오톡을 이용하는 횟수를 줄이고 친구와 전화를 해 볼 수도 있다. 또 예를 들자면 필자는 자주 가는 학교 앞 테이크 아웃 커피집에 일하는 분들과 몇 분이라도 수다를 떠는 것이 하루의 즐거운 놀이이다. 이러한 놀이의 경험이 쌓여서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슐트가 말한 것처럼,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수업에서 배운 여가란, 자유재량적 시간에 자유 선택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즐거움의 경험이다. 자유선택 ‘의지’가 있고 ‘행’해야 한다. 그냥 커피집을 매일 가면 안 된다. 가서 말을 먼저 붙일 정도의 의지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잘 안 될 때가 많다. 레스토랑에서 서빙 일을 하다보면 매니저님이 갑자기 툭툭 내뱉은 말에 울컥할 때가 많고, 일을 하는 도중에 미리 해놓지 않은 과제가 생각난다. 일도 과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로 그 ‘양가감정’이 드는 것이다. 그 날 하루는 너무 우울했다. 그 다음 날,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시키시는 일도 자주 듣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겁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 날은 일이 많아도 힘들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다. 
     읽는 내내 동감도 많이 했지만, 이러나 저러나 어찌되었든 선진국인 미국이 부럽기도 했다. ‘작아도 변하는 움직임’들을 소개해주는데, 마음 속에서 ‘작아도 변하는 움직임조차 왜 우리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것 같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회의적인 생각을 친구들과 나누곤 했다. “우리가 아기가 싫어서 안 낳냐, 지금 취업도 안 되는데”.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일이랑 병행이 한국에서 가능할까”, “난 그냥 결혼 안 할래” 등등. 아직도 깨끗하게 이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대 선진국의 조직문화도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데 한 나라의 사회가 갑자기 변하겠는가. 하지만, 눈에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긍정적인 행동을 멈추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 미국인인 저자가 직업을 갑자기 때려 치고 덴마크인들 같이 유유자적한 삶을 곧바로 살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를 포함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를, 더 나아가 이 세상을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한 걸음일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대학생 시절 '여가의 사회학' 교양 수업 과제로 쓴 북 리뷰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2016-2017년도 사이에 작성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