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어쩌면 특별한 일기 혹은 편지.
2019년 5월 15일 수요일
글을 쓰려고 나왔는데, 막상 나오니 머릿속이 하얗지도 않고 그냥 멈춰있네요. 하지만 내일도 엄마 아빠에게 속이고 출근하는 척 밖을 나올 수 없으니 어떻게라도 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를 지경이던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중간 이상은 하며 살려고 했습니다, 최소 일 년간은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일을 벌이기엔 요즈음 저는 용기가 부족하고 세상은 무서우니까요. 무엇을 해도 어떻게든 배울 일이 있을 것이고, 후에 다시 용기가 생겨 나의 일을 만들고 그 일로 밥을 벌어먹을 수 있을 때는 그렇게 일터에서 배웠던 것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경력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가 최고 경력자가 되어 몸과 마음을 바칠 마음은 없었지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다들 일단 들어가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직함도 받고 명함도 받고 경력도 쌓고 그러면서 더 맞는 곳으로 이직도 하고 그런다고 생각했고, 나에게 이만큼 안 맞고 저만큼 안 맞다고 평가하며 일꾼이 되지 않는 것은 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참으로 이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딸이 다시 취직했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드디어 ‘직장인’이 되었다며 기뻐하는 부모님 모습을 보는 것은 제게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일을 찾고 계약서를 쓴 것은 아니지만, 돈벌이가 없고 집에만 있을 때 저는 그 모습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는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쉬어도 쉬는 기분이 들지 않고 혼자 침대에서 입을 막고 울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저를 지지해주시고 도와주신 것에 저도 누구보다 빨리 보답하며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번 주에 세림이와 퇴근 후 익선동에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데, 계속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습니다. ‘언니, 마음 같아선 지금 다니는 곳 때려치우라고 하고 싶어’ 남들처럼 직장에 가고, 퇴근을 하고, 친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회사 욕을 하는 건데, 왜 때려치라고까지 하고 싶은지 궁금해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언니는 갤러리나 큐레이터 쪽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다고 했잖아, 미래를 상상했을 때 거기에 언니가 없다고. 그러면 지금 잘 버텨서 1년 경력을 채운다 해도 언니한테 남는 거는 경력증명서 말고 아무것도 없는 거 아니야?”
저는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도 없고 학문적 맥락에서의 미술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직종의 사람들은 -아직 잘은 모르지만- 학문적 공부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들이며, 그 노력에 비해 경제적 대우가 부족해 보여서 제겐 정말 하고 싶고 직업에 뜻이 있어야 가능한 일 같습니다. 하지만 대학원까지 미술을 전공한 저로써는 회사 같은 어느 단체에 속해 지속해서 돈을 받는 일로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외에 저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 의지로 일을 그만둔 건 아닙니다. 물론 해고당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직접 해고를 하기 싫으니 대표는 내게 놀랄만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으면 서로에게 맞는 곳이 아니지 않냐는 말을 길게 했습니다. 갤러리 일에 대단한 큰 뜻은 없는 제게 그런 아이디어는 없습니다. 물론 그만두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만두게 되었고 이미 일요일에 짐을 다 챙긴 저는 오늘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결정하지 못하고 자꾸 서성이는 저에게 대신 결정을 내려준 것인가 하는 긍정적인 생각도 듭니다. 세림이의 말처럼 다른 일이 결국 하고 싶은 거라면 지금부터 그 일이 무엇인지 도전하고, 실패하고, 나아가야 하겠지요. 결국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라면 말입니다. 일 년을 하고 싶은 일과 연관이 없는 곳에 있는 것이라면, 그만큼 나의 도전할 수 있는 시간에서 일 년이 사라진 것이겠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의사, 변호사, 삼성에 다니는 직장인처럼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대화하고, 그것이 예술과 관련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너무 즐겁습니다. 미술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고, 열심히 글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겠죠. 직함은 없어도 어쨌든 어떤 일이든 있겠죠. 이런 고민과 도전을 몸담고 일할 곳을 정하기 전에 구체적으로 해야 했는데, 무서워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금 하지 못하면 또 미뤄지는 것이겠지요. 저의 성질과 성향은 제가 원한다 해도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한번 배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미 충분히 걱정하고 힘들어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게 우울감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악순환에 빠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되려 이렇게 한 달도 일하지 못하고 다시 백수가 된 것이 마음 편하기도 합니다. 이제 저의 성향을 외면하지 않고 제대로 부딪치며 살아갈 수 있는 전환점이 된 것 같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제게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